요 약 11
제1장 머리말 35
제1절 연구의 목적 35
제2절 연구의 범위 및 방법 40
제2장 조선조 사회의 특징과 형벌관 45
제1절 조선 사회의 특징 45
1. 조선의 민본주의 46
가. 지배층의 민본의식 47
나. 민본의 상호성 50
2. 조선의 유교적 왕도정치 51
가. 유가의 왕도 51
나. 조선의 왕도정치 52
다. 조선의 인정(仁政) 53
제2절 조선조 지배층의 형벌관 55
1. 흠휼(欽恤) 행형 56
2. 인률비부(引律比附)로 휼형(恤刑) 시행 58
3. 관리에 대한 휼형 효유(曉喩) 60
4. 연좌(緣坐)의 적용 제한 62
제3장 휼형의 개념과 연혁 65
제1절 휼형의 개념 65
1. 휼형의 정의 65
2. 휼형과 유사 개념 66
제2절 휼형의 연혁과 시대별 사례 69
1. 삼국시대 이전 69
2. 삼국시대 72
가. 고구려 72
나. 백 제 73
다. 신 라 74
3. 고려시대 77
제3절 조선시대 휼형의 특징 84
1. 앞 시대 휼형(恤刑)의 내용의 계수(繼受) 84
2. 조선 법전의 휼수(恤囚) 규정 85
가. 경제육전(經濟六典) 85
나. 경국대전(經國大典) 86
다. 속대전(續大典) 87
라. 대전통편(大典通編) 88
마. 대전회통(大典會通) 89
제4장 조선왕조실록의 휼형 91
제1절 사 면(赦 免) 91
1. 개 념 91
2. 사면(赦免) 사례 중 휼형 93
3. 소 견 126
제2절 감형(減刑) 128
1. 개 념 128
2. 감형(減刑) 사례 중 휼형 129
3. 소 견 136
제3절 죄인(수용자) 처우 138
1. 개 념 138
2. 죄인처우사례 중 휼형 139
가. 의(衣)․식(食)에 대한 처우 139
나. 질병치료 및 의원배치 151
다. 분류수용 158
라. 금형일(禁刑日) 162
마. 옥(獄)의 개수(改修) 169
바. 기 타 179
3. 소 견 199
제4절 체옥(滯獄) 201
1. 개 념 201
2. 체옥(滯獄)사례 중 휼형 204
3. 소 견 217
제5절 남형(濫刑)․혹형(酷刑)․신형(愼刑) 218
1. 개 념 218
2. 남형(濫刑)․혹형(酷刑)․신형(愼刑) 사례 중 휼형 220
가. 남형(濫刑) 220
나. 혹형(酷刑) 229
다. 신형(愼 刑) 233
3. 소 견 236
제6절 속전제도(贖錢制度) 238
1. 개 념 238
2. 속전사례 중 휼형 239
3. 소 견 244
제7절 보방제도(保放制度) 246
1. 개 념 246
2. 보방제도(保放制度) 사례 중 휼형 246
3. 소 견 254
제8절 옥구(獄具)․형구(刑具) 255
1. 개 념 255
2. 옥구(獄具)․형구(刑具) 사례 중 휼형 256
3. 소 견 272
제9절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 273
1. 개 념 273
2.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 사례 중 휼형 275
3. 소 견 282
제10절 삼원신수제(三員訊囚制) 283
1. 개 념 283
2. 삼원신수제(三員訊囚制) 사례 중 휼형 283
3. 소 견 284
제11절 그 밖의 휼형 사례 285
1. 현 황 285
2. 기타 사례 중 휼형 286
3. 소 견 292
제5장 조선시대 휼형(恤刑)에 대한 평가 293
제1절 제도적 측면 293
1. 생명형․신체형 중심의 형벌체제 294
2. 신분에 따른 형벌 적용 298
3. 휼형(恤刑) 시행의 기준 302
4. 행형시설(옥)의 상태 305
제2절 인적(人的)인 측면 310
1. 관리들의 휼형(恤刑)에 대한 인식 310
2. 법관의 소양과 자질 313
제3절 휼형의 역기능 316
1. 형정(刑政) 문란 316
2. 공권력 경시풍조와 범죄의 악순환 319
3. 법 집행의 공정성 문제 321
제6장 맺는 말 325
참고문헌 333
영문요약 343
1. 연구 목적과 방법
세계 역사를 보면 하나의 민족으로서 ‘자기의 삶’ 즉 독자적인 민족의식, 민족정신, 민족문화를 가지지 못한 민족은 정치적․군사적으로 강성했던 나라였다고 해도 결국은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거나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것’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의 고유한 정신을 가지면서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따라서 교정과 형사사법 분야에서도 우리 나라 고유의 형벌이념을 정립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해당 학문을 연구하고 관계업무를 수행하는 자세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에 연구의 대상으로 한 조선시대의 휼형 사례 중에는 우리가 배우고 느껴야 할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우리의 고유이념을 세계화하는데 노력해야 하겠다.
이번 연구 보고서에서는 조선시대 휼형 사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휼형을 내용에 따라 11개 항목으로 분류하였다. 그 순서는 사면(赦免), 감형(減刑), 죄인(수용자)처우, 체옥(滯獄), 남형(濫刑)․혹형(酷刑)․신형(愼刑), 속전제도(贖錢制度), 보방제도(保放制度), 옥구(獄具)와 형구(刑具),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 삼원신수제(三員訊囚制) 그리고 그 밖의 휼형 등이다. 그리고 사례분석 후에는 조선조 휼형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시도하여 휼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었다.
2. 조선 사회의 특징과 형벌관
조선은 고려왕조의 멸망이 무단정치로 인한 백성들의 생활 피폐와 잦은 전쟁으로 인한 사회 혼란, 그리고 세금과 형정(刑政)의 문란으로 하늘에서 내린 재앙으로 보았다. 이것은 조선왕조를 개국하는데 정당성을 확보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天)으로서 민(民)을 중시하는 민본사상은 개국초기 국가 안정을 위해 가장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과 천을 동일시하는 사상은 실록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조선 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첫 머리에서 인군(人君)은 인정(仁政)을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주역(周易)에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니,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仁)이다.’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것을 본 받아서 인간이 자기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도전이 강조한 인정(仁政)의 모습이며 이 인정이 조선왕조 오 백년의 정신적 지주였다.
한편 조선조 지배층의 형벌관은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흠휼(欽恤) 행형, 인률비부(引律比附), 관리들에 대한 휼형 효유(曉喩), 연좌 적용의 제한 등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조선조의 역대 국왕과 주요 관료들은 항상 유학적 수양을 논하고 이의 실천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나라의 근본인 백성에 대한 형벌 적용에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그래서 서경(書經)에서 ‘조심하라, 형(刑)을 시행함에 조심하라’는 말을 항상 유념하게 하였으며 남형(濫刑)을 경계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유(赦宥)하여 죄인을 석방하거나 감형하였다. 그리고 조선조에서는 죄형법정주의와 정형주의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법전의 내용이 불비하여 법 시행에서 유추해석은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이를 인률비부(引律比附)라고 한다. 이 제도는 현대 형사법의 죄형법정주의와 상반된 관념으로 보기보다는 백성들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면 인률비부(引律比附)는 우리 전통법의 순기능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조는 “인명을 다루는 형옥(刑獄) 관리는 더욱 조심하여 성인의 법 제정 본의를 중시하고.....아직 율(律)이 정비되지 못하여서 정조(正條)가 없는 것이 십중팔구이니 처결에 경중을 잃지 않도록 하며, 정조가 없는 경우에 있어서는 근사한 율에 비부(比附)하여 판단할 것이며 이러한 판결례를 기록하여 쌓는다면 법이 자연히 만들어져 형벌처결의 어려움이 없어질 수 있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인률비부 사례는 조선조 전시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정신이 쌓이면서 휼형이 실천될 수 있도록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대 국왕들은 교지(敎旨)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을 접견하는 장소에서 ‘형(刑)의 사용을 신중히 하는 것은 수령의 선무(先務)이고, 형벌을 가볍게 하는 것은 애민(愛民)의 선무’라고 하면서 형벌을 시행함에 있어서 휼형해야 하는 이유를 간곡하게 설명하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조선조에서도 연좌제가 시행되었으나 모든 형벌에 적용된 것은 아니고 극히 일부 죄명에 대하여만 시행되었다. 태조 즉위 후, 탄생일을 맞아 내린 교지 중에서 “죄가 의심나면 경(輕)한 바를 따르고 죄는 처노(妻孥)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연좌에 대하여 제한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 때에도 백부(伯父)의 불충죄(不忠罪)에 부(父)까지는 연좌되지만 조카인 본인에게는 미치게 할 수 없다며 조카를 부사정(副司正)에 임명한 사례도 있다. 그리고 “예로부터 성인은 그 아들의 죄를 어버이에게 가하지 않았고 아우의 죄를 형에게 가하지 않았다. .....”고 하며, “착한 사람은 우대하되 혜택이 그 자손에 미치게 하고, 악한 사람은 미워하되 형벌이 자신에게만 그치게 함이 옛날의 후한 법임”을 깨우치고, 이외 “연좌(緣坐)하는 법은 예전에는 없었던 법인데 후세에 이르러 모반대역의 죄인에게 특별히 연좌의 법을 쓰고 있다”고 밝힌 것을 보면 조선에서는 연좌를 세월이 흘러오면서 생겨난 아름답지 못한 제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가능하면 억제하면서 불가피한 경우에 최소한에 그쳐야 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휼형의 개념과 연혁
1) 휼형의 개념
휼형(恤刑)이란 말은 순전(舜典) 중에서 ‘흠재흠재(欽哉欽哉), 유형지휼재(惟刑之恤哉)’ 즉 ‘삼갈지어다. 삼갈지어다 이 형벌 그 자체를 가엽게 여길지어다.’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고문헌에 나온 정의를 보면 ‘형(刑)의 시행을 신중하게 하는 일’〈수서(隋書) 형법지(刑法志)〉, ‘정실에 기울어지거나 권위를 두려워하여 관대하게 하지 않고 형(刑)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일’〈진서(晋書) 유파전(劉波傳)〉, ‘재판이나 형의 시행에 있어서 죄인을 위무(慰撫)하는 일’〈명사(明史) 형법지(刑法志)〉등의 정의가 있다. 이와 같은 중국문헌상의 정의와 고려와 조선조의 휼형 사례를 종합하여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결국 휼형(恤刑)은 ‘범죄인에 대한 수사․신문․재판․형 집행과정을 엄중․공정하게 진행하되 그 처리를 신중히 하고 죄인을 진실로 측은하게 여겨 성심껏 보살피며 형벌 적용에서도 용서하는 방향으로 모색하는 일체의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통 휼형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폭넓게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형고(刑考) 휼형편(恤刑編)의 사례를 보면 사면, 감형을 비롯하여 연좌제 금지, 신형(愼刑), 옥수(獄囚)의 병 치료, 옥(獄)의 청소, 태배법(笞背法) 폐지, 체옥(滯獄) 금지 등 수 많은 내용으로 세분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휼형의 연혁
우리 나라의 휼형에 대한 연혁은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시대의 휼형에 관한 사료로는 고려 충렬왕 때, 승려(僧侶)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 중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형벌(刑罰)을 주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또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과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연조(燕條)에는 고조선 사회에서 시행되었다는 팔조법금(八條法禁) 중 3개 조항과 이 법에 포함된 돈으로 형벌을 대신하였다는 제도는 후대에 시행되었던 속전제도(贖錢制度)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주지방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부여국(扶餘國)은 고조선과 함께 우리민족이 옛날부터 시행해온 행형제도를 밝힐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나라로 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에 의하면 ‘부여는 궁실, 성책 ,창고, 뇌옥(牢獄) 등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으며, ‘성책은 원형(圓形)으로 마치 뇌옥(牢獄)과 같았다.’고 한 기록과 함께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서는 ‘이음력12월제천(以陰曆十二月祭天), 대회연일(大會連日), 음식가무(飮食歌舞), 명왈영고(名曰‘迎鼓’). 시시단형옥(是時斷刑獄), 해수도(解囚徒)’라고 하였다. 즉 ‘음력12월에 지내는 제천행사에는 연일 많이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준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죄수를 사면(赦免)한 효시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죄인을 풀어주는 제도, 이것은 바로 휼형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빈번히 시행된 휼형의 전형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도 휼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 먼저 고구려에서 시행한 휼형(恤刑)의 종류는 대부분이 사면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제2대 유리왕 23년에 태자를 세우고 전국의 죄수를 석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2년과 제4대 민중왕(閔中王) 즉위년에도 죄인을 사면하였으며, 제11대 동천왕(東川王)․제12대 중천왕(中川王)․제25대 평원왕(平原王)․제26대 영양왕(嬰陽王)때에도 대사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서기 372년)에 더운 여름 날씨에 옥(獄)에 수금된 죄수들이 고통받는 것을 염려하여 ‘죄수를 옥에 오래 가두지 말고 판결을 신속하게 진행하라’고 명한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왕들이 죄인들에 대한 휼형 정신이 형벌의 배경이 되었다는데 대해서는 의심이 없다.
백제에서도 휼형은 주로 사면(赦免)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2대 다루왕(多婁王) 6년(서기 33년)에 태자를 세우고 사면하였으며, 동왕 28년(서기 55년)에는 여름 날씨가 계속 가물자 여수(慮囚)한 후 사죄를 사면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왕 2년에는 ‘지방 옥에 구금된 죄인에 대해서도 비록 죽을죄(死罪)라고 하더라도 즉시 집행하지 말고 서울의 옥(獄)으로 이송하여 복심(覆審) 후에 결정하라’는 기록에서는 당시에 사형수에 대하여 복심을 시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시행한 휼형 관련 내용은 주로 사면(赦免)이었다. 먼저 유리왕(儒理王) 2년(서기 25년)에 시조묘(始祖廟)에 참배한 후 사면하였고, 파사왕(破娑王) 11년(서기 90년)에 중앙에서 관리 10인을 파견, 주군(州郡)을 염찰(廉察)하게 한 후 형옥을 신중하게 시행하지 않는 자는 폄출(貶黜)하게 하였으며, 소지왕(炤智王)이 왕위에 오른 해와 동왕 10년(서기 488년) 2월에 왕이 일선군(一善郡 : 현재 선산 일대)에 거동하면서 지나는 주군(州郡)의 가벼운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그리고 성덕왕(聖德王)이 즉위했을 때와, 동왕 5년(서기 706년) 겨울과 6년(서기 707년) 봄, 7년(708년) 여름, 8년(709년) 가을, 9년(710년) 봄에 각각 사면하였다. 이때에는 흉년이 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나타나니 번번이 사유(赦宥)를 행하여 거의 없는 해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무왕(文武王) 9년 삼국통일을 이룩한 이후에도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유교의 정치이념을 가미한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형성하면서도 모든 사회문물은 불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불교국가였다. 제11대 문종 때에는 최충의 보필로 고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이 시기에 고려형법(高麗刑法)을 완성하고 사형수(死刑囚)에 대하여는 삼복제(三審制)를 실시하여 최종적으로 왕의 재결이 없으면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여 죄인의 생명을 신중하게 다루었다.
고려시대에는 형정(刑政)과 관련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다른 몇 가지의 특징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형제도(五刑制度)의 확립이다.
둘째, 독립 행형관서(行刑官署)인 전옥서(典獄署)를 설치하였다.
셋째, 휼형제도가 보다 구체화되었다.
먼저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와 삼원신수제(三員訊囚制)를 실시하여 행형 과정에서 백성들의 인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신중하게 다루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수금된 자 중에서 조부모 상(喪)을 당한 자나 산월(産月)에 다다른 부녀에게 옥중(獄中) 휴가제도를 시행하였고, 국가적 경사나 그 밖의 길흉사가 있을 때에는 대사(大赦)를 실시하였다. 또한 제34대 공양왕(恭讓王) 4년 3월 조에는 헌사(憲司)의 상소에서 전옥서에 의관(醫官) 1명을 배치하여 6개월마다 교대로 병든 죄수를 구료하게 한 내용은 우리 나라 행형시설에 처음으로 의관을 배치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이 제도의 시행으로 형벌집행과정에서만 이루어졌던 휼형이 이제는 죄인들의 처우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고려조에서 시행되었던 휼형에 관한 사례 중 중요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2대 혜종(惠宗) 원년(944년)에 ‘나이 70세 이상의 부모를 수호(守護)할 이가 없이 그 아들이 죄를 범하여 마땅히 섬에 유배(流配)해야 할 경우라도 (집에) 머물러 두게 하여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도록 한’ 판결을 하였고, 제13대 선종(宣宗) 2년(1085년)에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사수(死囚)를 청단(聽斷)하면서 음악을 멈추고 소선(素膳)을 올리게 하였다. 또한 선종 5년(1808년) 오랜 가뭄 때문에 조(詔)하기를, ‘어찌 중외(中外)의 영어(囹圄)에 생재(眚災)가 없겠는가? 가벼운 죄수와 작은 죄는 모두 용서하도록 하라.’ 고 하여 죄수를 사면하였다. 제17대 인종(仁宗) 2년(1124년)에 판(判)하기를, “죄인(罪人)을 추문(推問)하면서 죄의 경중(輕重)을 살피지 않은 채 무식(無識)한 장수(杖首)로 하여금 참혹하게 결박(結縛)하게 하는 것이 관리들의 버릇이 되어 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운명(殞命)하게 하니, 이후로는 대성(臺省)과 내시원(內侍員)이 사계(四季)에 감옥(監獄)할 때를 당하면 안문(按問)해서 곧 과죄(科罪)를 하도록 하라.”고 하여 형구(刑具) 남용과 재판절차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공민왕(恭愍王) 19년(1370년)에 김속명(金續命)의 상소에 이르기를, “전옥(典獄)은 죄인이 모인 곳이므로 여기(厲氣 : 죄수들이 내뿜는 기운)가 답답하게 오염되어 병이 나기 쉬운데, 사람들이 죄가 없으면서도 그곳에서 죽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몹시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바라건대,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6삭(朔) 씩 서로 바꾸어 가면서 전옥(典獄)에 출사(出仕)하게 하여 병든 죄수의 증후(證候)를 살피고, 약(藥)을 조제해서 치료하게 하여 뜻하지 않게 당하는 재화에 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형조(刑曹)의 정랑(正郞)․좌랑(佐郞) 일원(一員)으로 하여금 월령(月令) 안에서 옥관(獄官)과 의원(醫員)이 근무태도를 고찰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는 당시 옥의 실상과 병든 죄수들의 치료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휼형 관련 기록이다.
4. 조선왕조실록의 휼형(恤刑) 사례
조선시대 휼형 사례는 사면(赦免), 감형(減刑), 죄인(수용자)처우, 체옥(滯獄), 남형(濫刑)․혹형(酷刑)․신형(愼刑), 속전제도(贖錢制度), 보방제도(保放制度), 옥구(獄具)와 형구(刑具),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 삼원신수제(三員訊囚制) 그리고 그 밖의 휼형 등 11개 항목으로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1) 사면(赦免)
사면은 ‘죄를 용서하여 벌을 면제하는 일’ 또는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죄인을 용서하여 석방하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사면은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사면에는 원칙적으로 모든 죄인이 사면되는 경우와 예외적으로 사면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특별사면에는 죄명을 정하여 사면하는 경우와 감형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조선조에서의 사면은 태조 때부터 역대 모든 왕들이 수시로 사면을 실시하였고 사면의 사유는 국가의 경사(慶事)나 애사(哀事) 그리고 천재지변이 있을 때에 시행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면(赦免) 시행절차를 대명률(大明律)이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그 대상과 취지를 명백히 밝혀 률(律)에 따라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조선조의 사면 시행은 생각보다 신중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사면 절차에서는 먼저 석방할 죄인과 석방하지 아니할 죄인에 대하여 한양에서는 형조나 의금부에서,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등급을 나누어 기록하여 보고(錄啓) 하였다. 그리고 배소(配所)에 도착한 자와 도착하지 못한 자, 아직 구금되지 못한 자를 모두 거론하고 배소(配所)에 도착하지 못하고 당시 한양이나 지방에 구금된 자로서 도류안(徒流案)에 모두 기록되지 아니한 자는 해당 기관에서 조사하여 별단으로 서입(書入)하며, 사형을 감하게 될 죄인을 관찰사가 방질(放秩)을 혼합하여 기록한 자는 형조에서 고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면 조건을 세밀하게 정한 대신 사면의 혜택이 보다 많은 죄인들에게 해당될 수 있도록 힘썼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혹서기와 혹한기 그리고 장마가 길어질 때에는 사면을 시행하여 불쌍한 백성들의 생명을 구한 예가 많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면은 국왕에 따라 사면 기준이 달랐고 또한 사면 횟수가 너무 잦았다. 그래서 국법의 엄정성과 효율성을 저해하고 사회기강을 해이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감형(減刑)
감형은 ‘감강종경(減降從輕)이라 하여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는 유형(流刑)으로, 유형(流刑)에 해당하는 죄는 도형(徒刑)으로, 도형(徒刑)은 장형(杖刑)으로 강등(降等)하여 가벼운 죄로 쫓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조에서는 사면과 함께 감형이 휼형의 종류로는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그리고 감형의 사유도 매우 다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제3대 태종 때에는 저화(楮貨)를 위조한 맹인(盲人)은 죄를 면제해주고 같은 죄를 저지른 무녀(巫女)와 역리(驛吏)는 무지(無知)에서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하여 죄를 감등(減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성종 때에는 안성(安城)의 죄수인 강도 와주(窩主) 최흥손은 형률에 의하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고 그 처자는 소재지 관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켜야 했으나 국왕은 사형을 감(減)하라고 명한 것 등의 사례를 볼 때, 조선의 국왕은 죄인에 따라 정상(情狀)을 적극적으로 참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흉악한 죄인이라 하여도 마지막 결정에서는 감형(減刑)하여 백성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결정하려고 애쓴 흔적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숙종 때에는 경성(京城)의 9세 된 아이 준걸이 이웃에 살고 있는 11세 된 아이 호량과 싸웠는데 호량이 상처를 입고 3일 만에 죽으므로 형조에서 준걸을 형장(刑杖)으로 신문하여 자복(自服)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죽여야 한다’는 법이 아무리 엄격하다고 해도 나이 겨우 아홉 살이면 몽매하고 지식이 없는 한낱 어린아이이다. 옛 사람이 이른바 ‘만일 그의 범죄 정상을 속속들이 안다면 마땅히 슬퍼하며 불쌍히 여길 것이지 내가 잘 적발하였다고 기뻐하지 말라’ 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무리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사형으로 결정하면 너무 가엾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한 결과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였다.
그 밖에도 숙종 때 술에 취해 궁궐 담을 넘어 들어 온 사람을 교형(絞刑)에서 감사하여 유배하였고, 영조 때 어기(御器)를 훔친 궁녀를 특별히 사형을 감해 섬으로 유배하였으며, 어보(御寶) 위조 죄인을 감사 정배 하였는데 이때 영조는 ‘백수(白首) 늙은 나이에 무슨 마음으로 어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대벽(大辟)에 처하겠느냐’고 하면서 감형하였다. 순조 때에는 황간현(黃澗縣)의 옥에 갇힌 죄수를 폭력으로 빼앗아 낸 죄인 9명을 대명률의 ‘겁뢰(劫牢)한 자는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벤다’는 법문(法文)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아뢰었으나 수범(首犯) 2명만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감사정배(減死定配) 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조에서는 수시로 감형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국왕이 죄지은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는 인정(仁政)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전제 왕권국가에서 왕(王) 한 사람의 판단이 너무 크게 작용한데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죄인(수용자) 처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처우(處遇)라는 개념이 없었다. 다만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은 유교이념에 따라 인정(仁政)의 일환으로 그들의 의식주(衣食住) 등 최소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에서는 죄인들에 대하여 생각보다는 다양한 제도를 통하여 오늘날 교정처우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죄인들의 의(衣) 식(食)에 관한 것이다. 당시에는 죄인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굶주리는 경우가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옥에 수용된 죄인들도 굶주리는 때가 많았고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많은 국왕들은 수시로 이에 실정을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해 왔던 것이다.
세종 18년 11월 17일에는 평안도․함길도로 이주하는 죄인과 그 가족을 수령들이 보호하고 구휼하지 아니한다는 보고를 받고 ‘앞으로는 지나가는 역(驛)과 관(館)에서 식량과 의복을 공급하여 배고프고 춥지 않게 하고, 정주(定住)하는 곳의 각 고을에서는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 구휼하고 양육하여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고 하였다. 세조는 수시로 주서(注書)나 내의(內醫)를 전옥서와 의금부 옥으로 보내 죄인들의 거처를 살피게 하고 동사자나 감기든 자가 없는지를 확인시켰고 또한 거처의 청결 상태와 포진(鋪陳)․급수(汲水)등을 살피게 하였다. 광해군 14년 2월 4일에는 ‘금부옥에 갇힌 죄인들이 형벌을 받은 일도 없는데 잇달아 병들고 다치니 관리들이 구료에 힘쓰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금부당상과 당해도사, 월령의관을 함께 추고(推考)하라’고 하였다. 또한 효종 13년 12월 24일에는 ‘사관을 전옥서로 보내 점검해 보니 죄인 중 8명이 홑옷을 입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해당 관서로 하여금 겨울옷을 지어주고 땔나무를 지급하게 하였고 또한 각 도에 지시하여 옥에 갇힌 죄인들에게 땔나무를 지급하게 하였다.’
다음으로는 옥에 갇혀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죄인들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휼형의 사례를 보면, 세종 19년 11월 9일 ‘전옥서(典獄署)에 역질(疫疾)이 크게 번졌으니 의원을 정하여 구제하고 혜민국으로부터 각종 약재를 미리 받아가 시기에 맞추어 구료(求療)하여 죽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성종 16년 1월 10일 ‘옥중에 있는 죄인들에게 동상이 없지 않을 것이다. 관리를 불러서 내 뜻을 자세히 타이르라’고 하였다. 광해군 8년 11월 20일 ‘죄인들이 오래도록 처결되지 않고 있다. 월령 의원을 가려 정하여서 약물과 죽을 가지고 힘을 다하여 구료하게 할 일을 색승지(色承旨)는 더욱 살펴 거행하라’고 하였다. 또한 효종 1년 3월 4일에는 ‘전옥서(典獄署)의 중죄수 중에 질병에 걸린 자가 많다고 하니 너무나 불쌍하다. 성심껏 치료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둘째로 조선조에서 시행한 죄인의 분류수용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태종 8년 1월 8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에는 잡범(雜犯)을 가두지 말라’ 고 하교하였다. 그것은 의용순금사는 조옥(詔獄) 즉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신문하거나 가두는 옥으로서 다른 기관과 같을 수 없다’는 순금사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중종 13년 1월 6일 ‘전옥서와 의금부 옥에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수용하는데 따른 폐단을 없애기 위해 분리 수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녀 죄인에 대한 분리수용은 세종 시대에도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대가 바뀌면서 이와 같은 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해군 8년 6월 3일 ‘해주(海州)에서 잡혀온 죄인은(공범관계자)은 35명이나 의금부의 옥호(獄戶)는 32칸으로 옥호가 모자라므로 신문이 끝난 죄인은 함께 수용하기를 건의하자 왕은 공범을 함께 수용하지 못하게 하고 공범이라고 하여도 여인들은 한 칸에 수용하도록 하였다’ 정조 3년 6월 15일 ‘남간(南間)에 가두라고 명이 없는데도 죄인을 남간에 가둔 관리를 파직하게 하였다.’ 조선조의 의금부 남간은 사형수를 수용하는 옥호 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선시대에도 금형일(禁刑日)을 시행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각 관사(官司)에서는 대전(大殿)․왕비의 탄일과 왕세자의 생신․대제사(大祭祀)와 치제〈致祭 : 제사 지내기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며 정성을 가지는 일이다〉․삭망(朔望)․상현(上弦)․하현(下弦)․정조(停朝)․시일(市日)에는 고신(拷訊)과 결벌(決罰)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24절기․비가 개이지 아니한 때․밤이 새지 아니한 때에는 사형을 집행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하였다. 대전(大殿)의 탄일의 전후의 각 1일간도 같다.
그 밖에도 법전에 규정된 금형일 이외에 수시로 형의 집행이 금지된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일식(日蝕)․월식(月蝕)의 날이 그것이다.
네째로 옥(獄)의 개수(改修)이다. 옥 시설은 죄인에 대한 인도적 처우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조 세종 때에는 안옥도(犴獄圖)를 작성하여 전국의 옥(獄)의 형태를 통일하고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신․개축하였고 역대 국왕들도 옥을 청결하고 사람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옥은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내부도 협소하였고 또한 자유로운 생활이 제한됨으로 인하여 질병 치료 등 일반적인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체옥(滯獄)
체옥은 조선조 형사사법제도의 가장 큰 난맥상이었다. 각종 형법전에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을 두고 있었으나 이러한 규정은 사문화 되다 시피 하였던 적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결옥일한(決獄日限)을 규정하여 시행하고 국왕들이 수시로 체옥하지 말 것을 하교하였으나 체옥의 폐단을 근절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지적한 옥중오고(獄中五苦)에는 죄인들이 옥에서 겪는 고통 중에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체유지고(滯留之苦), 즉 ‘오래 머물러 기다려야하는 고통’이라고 하였다. 협소한 옥에서 정해진 형기(刑期)도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했던 당시의 죄인들의 참상(慘狀)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그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어느 사관(史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국왕의 체옥 해소를 위한 노력이 형식에 치우치는 면이 있었다고 해도 역대 국왕들의 그와 같은 노력의 바탕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민본정신(民本精神)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할 만 하다.
5) 남형(濫刑)․혹형(酷刑)․신형(愼刑)
근대 이전시대에 있었던 형벌의 종류가 말해주듯이 당시에는 생명형(生命刑)과 신체형(身體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고신(拷訊 : 拷問)이 허용되었던 때였다. 이와 같은 원죄(原罪)는 당시의 형벌체제 아래에서는 남형(濫刑)과 혹형(酷刑)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 5년 1월 12일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고 끊어진 것은 다시 이을 수 없으니 옥사를 맡은 관원들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신중하게 처결하고 남형(濫刑)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 10년 1월 11일에는 ‘옛 사람이 이른바 형벌로 죽은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다고 하였다....(중략).....각 방백과 수령들에게 남형하지 않도록 지시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태배형(笞背刑)을, 영조는 전도주리형(剪刀周牢刑)과 낙형(烙刑), 난장형(亂杖刑)을 폐지하였으며 많은 국왕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신형(愼刑)할 것을 중앙과 지방 관리들에게 효유(曉喩)하였다.
6) 속전제도(贖錢制度)
속전(贖錢)은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말한다. 속전제도는 일반적으로 생명형(사형)․자유형(도형․유형)․신체형(태형․장형)의 집행을 대신하여 나라에서 속죄금을 받고 죄를 면제하는 것이다. 조선조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규정에서는 오승포(五升布)로 환산하여 받도록 하였는데 속전의 액수는 법으로 정하였다. 태종 11년 6월 3일 ‘사죄(死罪)에 대해서도 속(贖)하게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세종 19년 12월 9일 ‘속(贖) 바칠 액수의 4분의 1은 현금 대신 베로 바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현금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더 많은 속전의 기회를 주기 위한 조치였다. 조선조의 속전은 결국 국가재정 확충이라는 측면도 있었겠으나 백성들에게 재사회화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7) 보방제도(保放制度)
보방은 구금 중인 죄인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구금 중에 친상(親喪)을 당하는 사유가 있을 때 죄인을 옥에서 석방하여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하거나 상을 치르고 다시 구금하는 제도이다. 오늘날의 구속집행정지나 형집행정지, 그리고 귀휴제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방의 실질적 사유는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종19년 4월 30일 내린 전지에서 ‘수감된 죄인 중 관련된 사람들(공범자)은 (죄의) 경중을 확인하여 보방하였다가 원범인의 일이(신문이) 끝나면 한꺼번에 판결하는 것을 항식(恒式)을 삼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는 주범 이외 종범(從犯)은 모두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조치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단종 1년 4월 27일에는 ‘농사철인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죄인 중 일부를 보방하게 하였고,’ 순조 2년 3월 9일에는 ‘모친상을 당한 죄인을 보방하였다가 그 정리(情理)가 가련하다고 하여 석방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의 보방제도는 일부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형벌제도 아래서 백성들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는 제도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8) 옥구(獄具)와 형구(刑具)
휼형과 관련하여 옥구(獄具)와 형구(刑具)에 대한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형벌의 종류로 보아 옥구와 형구의 사용방법에 따라서 휼형(恤刑)의 시행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본 연구서에는 옥구와 형구를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옥구지도(獄具之圖)에는 옥구와 형구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옥구(獄具)’라 하여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미로 본다면 옥구와 형구는 그 기능면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옥구(獄具)는 죄인을 옥에 수금한 후 도주나 자살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를 말하는 것으로, 가(枷)․추(杻)․철삭(鐵索)․요(鐐)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형구(刑具)는 형을 집행하거나 고신(拷訊)에 사용하는 기구로 태(笞)․장(杖)․신장(訊杖)․곤장(棍杖)․원장(圓杖)․능장(稜杖)․행형도자(行刑刀子) 등이 있다. 이러한 옥구와 형구는 죄인들의 신체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이의 사용에는 엄격한 제한을 두었으나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17년 5월 11일에는 ‘신장(訊杖)과 압슬(壓膝)하는 방법에 대하여 자세한 세부 규정을 지시하였으며,’ 세종 13년 2월 25일에는 ‘2품 이상은(구금되어도) 쇄항(鎖項)을 제거하라’ 고 하였으며, 세조 10년 4월 17일에는 ‘형조에서 사용하고 있는 태와 장은 너무 크므로 죄인을 흠휼(欽恤)히 여기는 뜻에 어긋난다 하고 명하여 태(笞)․장(杖)과 교판(較板)을 가져다가 크기를 비교하라’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국왕들은 형구와 옥구의 사용을 감시하고 제한하는 노력으로 휼형을 시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9) 사수삼복제(死囚三覆制)
사수삼복제는 사죄(死罪)를 범한 죄인에 대한 심리를 신중히 하기 위해 초복(初覆)․재복(再覆)․삼복(三覆)으로 반복하여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는 백제에서도 시행되었으나 고려에서 세밀하게 규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서도 삼복을 시행한 사례는 많이 볼 수 있고 특히 중죄인에 대해서는 삼복이 행해졌다. 태조 1년 12월 16일 ‘형조에서 아뢰기를 형벌은 옛 성인이 신중히 하였으니 이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대벽(大辟)의 죄는 반드시 세 번 다시 아뢰게 하거나 다섯 번 다시 아뢴 후에 결정하였는데 요사이는 옛날의 법이 시행되지 아니하여 혹은 형벌이 그릇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대벽은 반드시 세 번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효종 5년 12월 18일에 ‘인명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비록 사죄를 범하였더라도 반드시 세 번 복심(覆審)해야 하는데......이러한 뜻을 팔도에 전유하여 형벌을 신중히 시행하게 하라’ 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복심제도는 조선조 전 시대에 걸쳐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명을 신중히 다루는 제도로 활용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을 보인다.
10) 삼원신수제(三員訊囚制)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은 고려 문종 15년 기록에 의하면 ‘형정(刑政)은 백성의 생명이 달린 것이므로 반드시 3품 이상의 관리가 각각 심리를 한 연후에 죄수를 신국(訊鞫)하게 하는 원칙을 내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현행 재판의 합의제와는 달리 삼원(三員)이 합의(合議)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고 3인의 관리가 각각 심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법관의 심증이 혹시 편파(偏跛)에 흐를 것을 우려하여 3인이 각자 각양의 심리방법과 심증을 이용하여 심리의 공증과 심중을 기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조선조에서는 삼성(三省)이 추국(推鞫)하는 제도로 시행되었다. 헌종 3년 6월 17일 ‘조모를 살해한 천안 사람을 삼성이 추구하여 참수(斬首)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이 제도 또한 공정한 심리를 통하여 진상을 바르게 밝히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한 것으로 휼형에 기여한 제도라고 하겠다.
11) 그 밖의 휼형 사례
조선조에서는 이상에서 설명한 휼형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휼형 사례를 남겼다. 세조 4년 8월 26일에는 ‘사형(死刑)을 집행할 때에는 형조의 낭관(郎官)과 전옥관(典獄官)․검률(檢律)이 함께 참석하여 감독하도록 하였고,’ 광해군 4년 6월 14일에는 ‘추국청(推鞫廳)에서 여자 죄인 맵가시가 임신하였다고 하니 형신(刑訊)을 멈추게 하였으며,’ 인조 3년 1월 20일 ‘역적 이괄의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3세 이하의 유아는 연좌율(緣坐律)에서 면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조 37년 1월 3일 ‘백성을 추문(推問)할 때 부모․형제․부인을 함께 잡아 가두는 것을 금지’하게 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형벌제도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5. 조선시대 휼형에 대한 평가
휼형은 지난 수 천년 동안 우리의 삶 속에서 생성되고 걸러지며 정착되어 온 내용이므로 우리 정서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휼형제도가 지닌 약점도 없지않은 것이 사실이다. 아래에서는 전통 휼형과 관련한 제도적․인적인 측면 그리고 역기능에 대하여 평가해 보고자 한다.
1) 제도적 측면
먼저 휼형과 관련하여 제도적 측면에서는 ‘생명․신체형 중심의 형벌체제(刑罰體制),’ ‘신분(身分)에 다른 형벌적용,’ ‘휼형 시행의 기준,’ 그리고 ‘행형시설(옥)의 상태’ 등에 대하여 살펴본다.
첫째, 생명․신체형 중심의 형벌체제이다. 조선의 형벌체제가 생명형과 신체형 위주로 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 적용에서 휼형을 시행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있었다. 당시의 형벌의 종류는 태형(笞刑)․장형(杖刑)․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의 오형(五刑)이 있었다. 그리고 이 오형 중에서 태형과 장형은 신체형(身體刑)이다. 이와 같은 신체형과 생명형 위주의 형벌체제의 심리나 형 집행과정에서는 항상 남형(濫刑)의 여지가 있어왔다. 특히 신체형<태형(笞刑), 장형(杖刑), 곤장(棍杖)>의 경우는 집행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신체형이 생명형으로 바뀔 수 있는 개연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조선조에서도 죄가 가벼운 죄인은 ‘조용히 말로 심문하도록 한다’ 고 되어 있었으나(口訊平問) 실제로는 합법적인 고문을 인정한 사회였으므로 형벌의 남용은 합법화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태종17년에 신장(訊杖)의 집행내용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였고, 세종3년에는 신장의 규격을 대명률의 규정보다 작도록 개정하였으며 태배형(笞背刑)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영조원년에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그 후 전도주리형(剪刀周牢刑)․낙형(烙刑)․난장형(亂杖刑)을 폐지하여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였으나 당시 형벌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그 실효성을 거두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둘째, 신분에 따른 형벌적용이다. 조선왕조는 숭유정책을 취한 신분사회였다. 이씨 왕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신흥관료가 지배적인 신분계층인 양반계급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분체제는 형벌을 포함한 조선사회의 모든 제도를 운용하는 기본적인 표준이 되었다. 따라서 형벌을 적용하고 옥구(獄具)를 사용하는데도 양반과 평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의 관리들은 법 이외에 예(禮)라는 기준에 의해 폭넓게 사회적으로 통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관리들은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뇌물을 수수하는 자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이러한 사회풍토는 조선이 삼권분립이 존재하지 않은 행정국가이면서도 오 백년을 존속해 올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다고 본다. 결국 조선사회는 많은 백성들이 휼형의 수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휼형제도는 지배층을 위한 제도였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는 것이다.
셋째, 휼형시행의 기준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조에서 시행했던 각종 휼형은 법령에 규정된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하고는 그 적용기준이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면이나 감형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는 전례를 참고하기는 하였으나, 국왕 개인의 학식과 백성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형벌에 대한 철학과 통찰력에 따라 휼형의 폭이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의 휼형은 법에 따라 시행되기보다는 당시의 국왕과 신료들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 기준이 모호하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행형시설(옥)의 상태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조에서 휼형이 행형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시 형벌의 종류와 집행방법, 그리고 죄인을 수용하고 관리하는 행형시설, 즉 옥 설비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시대적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당시의 옥은 죄인들이 장기간 생활하기에는 협소하고 비위생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당시 국왕들은 옥을 신․개축하고 옥의 표준도면을 작성하여 중앙과 지방에 배포하는 등 옥의 개수에 노력하였으나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사면이나 감형, 그리고 보방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인적인 측면
다음은 조선시대 휼형에 관한 인적인 측면에서 ‘관리들의 휼형에 대한 인식’, ‘법관의 소양과 자질’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관리들의 휼형에 대한 인식문제이다. 조선조의 관리들은 휼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세종13년, 휼형에 관한 교지(敎旨)를 주자소에서 출판하게 하여 한양과 지방에 반포한 후, 찢어지거나 유실될 것을 걱정하여 한양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각 사(司)와 지방의 관아에서는 게시판에 휼형 교지 원본을 걸어두고 관리들의 교체시 인수 인계하도록 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새로 간행한 휼형 교지를 경외관 및 종친, 동반 5품 이상, 서반 3품 이상 관원에게 하사하였다.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당시 관리들은 휼형에 대한 인식이 국왕이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둘째, 법관의 소양과 자질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조의 관리들은 대개 과거를 거쳐 선발하였다. 그러나 법률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율과(律科)라는 잡과(雜科)를 거쳐 임용하였으며, 율과 출신으로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품계는 종 6품으로 율학교수(律學敎授)나 겸교수(兼敎授)가 고작이었다. 형벌을 관장하는 형조(刑曹)나 의금부(義禁府) 또는 각 도(道)의 관찰사들은 모두 대과(大科) 출신자들이 차지함으로써 법률전문가들이 형사사법담당기관의 책임자가 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던 관리임용제도의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형벌집행과정에서 국왕들이 요구하는 정도의 휼형이 시행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제도적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3) 휼형의 역기능
여기에서는 조선시대의 휼형의 역기능에 대해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형정(刑政)의 문란이다. 휼형은 백성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여왔으나 사면과 감형의 경우를 보면, 먼저 그 빈번함으로 인한 형정(刑政)의 문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산군 원년 7월에 왕이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하려 하니, 윤필상 등이 ‘옛말에 이르기를 사면이란 양민(良民)을 해롭게 하고 소인(小人)들에게는 요행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죄의 경중을 가려 용서할 자만 용서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연산군은 7개월 사이에 무려 4번이나 사면을 단행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옥(獄)안의 문란 사항을 볼 수 있는데, 관리들과 오래된 죄인들이 저지르는 침학(侵虐)과 토색(討索)질에 대한 실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잦은 사면과 감형, 그리고 옥에 대한 감독의 소홀로 형정이 문란할 수밖에 없었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공권력 경시풍조와 범죄의 악순환이다. 사면과 감형을 자주 시행하고 보방제도와 사수삼복제를 시행하는 것은 휼형의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휼형은 전문 범죄꾼들과 간사한 무리들에게 요행심을 심어주고 구면무치(苟免無耻)의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범죄를 조장하고 공권력을 경시하는 풍조를 만연시켰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법집행의 공정성(公正性)문제이다. 휼형을 시행함으로써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고 신체를 보존하는데는 기여하였으나, 휼형 시행이 법 집행의 공정성을 저해한 부분도 없지 않다. 사형수에 대한 삼복(三覆)을 행하면서 어떤 사람은 형을 면제받고 어떤 사람에게는 형이 집행되는 기준은 그 당시의 국왕과 신료들의 일시적인 판단에 의해서 결정됨으로써 엄정한 증거에 의해 유 무죄를 결정하는 오늘날의 형사사법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